
우리는 모두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삶의 조건 속에서 눈을 뜹니다.
어떤 부모님 밑에서 태어날지, 어떤 형제자매와 유년기를 보낼지, 우리는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연극이 시작되기 전, 이미 정해져 버린 무대와 배경과도 같습니다.
어떤 이는 화려한 궁전에서, 어떤 이는 비바람 치는 들판에서 자신의 첫 막을 시작합니다.
이 ‘선택할 수 없는 영역’은 때로 우리 삶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불공평함에 대한 원망이나 체념을 싹트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극의 배경이 전부가 아니듯, 우리의 출발선이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막이 오르고 조명이 켜지는 순간, 그 무대 위에서 어떤 대사를 하고, 어떤 걸음걸이로 어디를 향해 나아갈지는 오롯이 ‘배우’인 우리 자신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이희재 씨가 주연했던 “그래, 선택했어”라는 제목의 TV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 설 때마다, A를 선택했을 때의 삶과 B를 선택했을 때의 삶을 극명하게 보여주던 그 프로그램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것은 단 한 번의 선택이 우리의 우주를 어떻게 두 갈래로, 혹은 수만 갈래로 나누어 놓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모와 가족이라는 ‘주어진 운명’을 딛고 서서, 매 순간 ‘선택하는 운명’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인생은 거대한 선택의 연속입니다.
아침에 눈을 떠 어떤 옷을 입을까 하는 사소한 고민부터, 어떤 배움을 택하고, 누구를 사랑하며, 어떤 신념을 지키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중대한 결단까지.
우리의 하루하루는 이 선택들이 모여 엮어내는 한 편의 태피스트리(tapestry)입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중요한 선택의 순간,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방향타’ 삼아 올바른 항해를 할 수 있을까요?
인생이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은,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매 순간 선택의 무게를 견뎌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무게가 버거워 때로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주저앉고 싶어집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부리단(Jean Buridan)이 남긴 우화 속에 ‘부리단의 당나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당나귀는 두 개의 건초더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왼쪽 건초더미와 오른쪽 건초더미는 거리도 똑같고, 양도 똑같고, 심지어 맛까지 똑같아 보였습니다. 당나귀는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도무지 결정할 수 없었고, 결국 양쪽 건초더미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이 우스꽝스러운 당나귀의 모습이 혹시 우리의 자화상은 아닐까요?
이 길이 더 나을지, 저 길이 더 나을지 끊임없이 저울질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소중한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
‘선택하지 않음’ 또한 하나의 선택이며, 때로는 가장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선택임을 우리는 종종 잊곤 합니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는 그의 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에서 숲속의 두 갈래 길을 보며 이렇게 읊조립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어디에선가 /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이 시의 핵심은 어느 길이 더 좋았느냐가 아닙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우리는 필연적으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궁금증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선택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동양의 오랜 격언처럼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법”입니다.
내가 오늘 심은 선택의 씨앗이, 미래의 내 삶이라는 밭에서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온전히 나의 책임입니다.
이처럼 선택의 자유는 곧 책임의 무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어떻게 하면 ‘올바른 선택’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요?
내 삶이라는 배를 이끄는 방향타는 어디에 숨겨져 있는 것일까요?
첫째,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과 ‘선택할 수 있는 것’을 냉철하게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는 고대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들이 평생에 걸쳐 강조했던 가르침입니다.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말했습니다.
“우리 힘에 달려 있지 않은 것들(부모, 날씨, 타인의 평가)은 그저 받아들이고, 우리 힘에 달려 있는 것들(나의 판단, 나의 욕구, 나의 선택)에만 집중하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없었던 부모님이나 나의 환경을 원망하는 데 에너지를 쏟는 것은, 이미 출발한 배 위에서 ‘왜 이 배는 나무로 만들어졌는가’라며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현명한 선장은 주어진 배의 성능을 정확히 파악하고, 오직 자신이 조종할 수 있는 ‘키(rudder)’와 ‘돛’에만 집중합니다.
우리의 방향타는 바로 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나의 선택’에 있습니다.
둘째, 나의 ‘내면의 가치관’을 방향타의 중심축으로 삼아야 합니다.
맹자(孟子)는 ‘생선(魚)’과 ‘곰 발바닥(熊掌)’을 두고 유명한 비유를 듭니다.
둘 다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둘 다 가질 수 없다면 더 가치 있는 곰 발바닥을 택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는 이를 확장하여, ‘삶(生)’과 ‘의로움(義)’ 사이에서 갈등할 때,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 교과서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선택은 늘 단기적인 이익(利)과 장기적인 가치(義) 사이의 갈등입니다.
당장의 편안함과 눈앞의 이익을 좇는 선택은 달콤하지만, 결국 나를 엉뚱한 곳으로 이끌어 갑니다.
반면, 조금 힘들고 손해 보는 것 같아도 나의 신념, 나의 양심,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족, 성장, 정직, 사랑 등)에 부합하는 선택을 할 때, 그 배는 폭풍우 속에서도 항로를 잃지 않습니다.
당신의 방향타는 ‘세상이 정한 정답’이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정한 가치’여야 합니다.
그리스 신화 속 ‘파리스의 선택’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그는 헤라(권력), 아테나(지혜), 아프로디테(사랑)라는 세 여신이 내민 사과 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얻게 해 주겠다는 아프로디테의 제안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이 선택은 결국 트로이 전쟁이라는 거대한 비극의 씨앗이 됩니다.
이 신화가 말해주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때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경고이자, 동시에 그 선택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오롯이 ‘자신의 몫’이라는 진실입니다.
파리스는 권력이나 지혜 대신 사랑을 택했고, 그 결과를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쩌면 매일 ‘파리스의 사과’를 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몰라 ‘부리단의 당나귀’처럼 망설이고 있다면, 이제 고개를 들어 당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당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과거의 배경이 아니라,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의 키(방향타)에 집중하십시오.
인생은 정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나의 가치관에 따라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며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당신이 내린 수많은 선택들이 모여, 세상에 단 하나뿐인 당신의 삶을 완성해 갈 것입니다.
설령 그 선택이 때로 후회를 남긴다 해도, 그조차 당신의 삶을 이루는 소중한 무늬가 될 것입니다.
두려워 말고, 당신의 방향타를 단단히 잡으십시오.
당신의 선택을 믿고, 담대하게 항해하십시오. 당신의 모든 선택을 뜨겁게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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