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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인생의 나침반 제3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이유 (feat. 햄릿의 고뇌를 넘어)

by 관리자 범부 2025.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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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창 속에서도 삶을 사랑할 이유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 등장하는 이 유명한 대사는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고뇌를 담고 있습니다.

햄릿은 부조리한 세상 앞에서 깊은 회의와 절망에 빠져, 삶을 끝낼 것인가, 아니면 이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존재론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그의 고뇌는 비단 왕자 햄릿만의 것이 아닙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홀로 갇힌 듯한 기분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나를 비껴가고, 거대한 우주에 나만 홀로 표류하는 것 같은 끔찍한 고독감.

그 고독이 깊어지면,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수많은 이유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숨이 턱 막히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 임계점을 넘을 때, 우리는 '죽음'이라는 서늘한 친구에게 슬며시 손을 내밀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햄릿이 그러했듯, 우리는 '존재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실존적인 질문의 경계에 서게 됩니다.

그것은 결코 오래도록 숙고한 이성적인 결론이 아닙니다.

훗날 돌아보면, 그 모든 것은 단 '한순간의 판단'이자, 폭풍처럼 휘몰아친 '찰나의 감정'에 사로잡힌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 옛 어른들은 "문 밖이 저승이다"라는 무서운 말로 그 찰나의 위험성을 경고하셨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그렇게 한 뼘도 되지 않는 얇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 찰나의 시간만, 그 문턱만 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저는 당신의 손을 잡고, 바로 그 위태로운 문턱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문턱을 넘어섰을 때 펼쳐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이유에 대해, 저의 부끄러운 고백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햄릿의 고뇌를 넘어, '살아남는 것'이 왜 궁극적인 승리이며 가치 있는 일인지를 함께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왜 그토록 고통스러우면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 조상들은 참으로 현명하면서도 직설적인 답을 남겨주셨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좋다."

이보다 더 삶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뜨겁게 긍정하는 말이 또 있을까요?

이 속담은 지금 내 처지가 비록 개똥밭을 구르는 것처럼 비참하고 더럽고 냄새날지라도, '모든 것이 끝나버린' 저승보다는 '살아 숨 쉬는' 이승이 백배 천배 낫다는 절절한 외침입니다.

왜일까요?

죽음은 모든 가능성의 소멸입니다.

기쁨도, 분노도, 슬픔도, 즐거움도, 그 어떤 감각도 느낄 수 없는 영원한 무(無)의 상태입니다.

불교 철학에서 말하는 윤회(輪廻)의 고리, 즉 반복되는 삶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解脫)에 이르는 것을 이상으로 삼기도 하지만, 그 해탈 역시 '고통 없는' 경지를 의미하지,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을 미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불교의 자비(慈悲)는 모든 중생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구원하려는 살아있는 존재들의 행위 속에서 빛납니다.

죽음은 이 모든 가능성과 행위를 끝냅니다.

하지만 '이승'은, 이 개똥밭은, 적어도 우리에게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허락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서 뜨겁게 사랑하고, 때로는 미친 듯이 분노하고, 가슴이 찢어지게 슬퍼하고, 아이처럼 즐거워합니다.

이 감각들의 총체가 바로 '살아있음'의 증거입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시시포스(Sisyphus)'를 떠올려 봅니다.

그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영원히 거대한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습니다.

바위는 정상에 닿는 순간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시시포스는 다시 그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합니다.

이 얼마나 허무하고 절망적인 삶입니까?

어쩌면 우리가 겪는 고통도 매일 반복되는 이 부질없는 바위 밀기와 닮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이 신화를 재해석하며 "우리는 시시포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과정' 그 자체, 자신의 운명을 '의식'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그 순간에 있습니다.

그는 적어도 돌을 만지는 감촉을 느끼고, 땀을 흘리며, 숨을 쉬고,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노려볼 수 있습니다.

그는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이 모든 의식과 저항마저 앗아갑니다.

시시포스는 영원한 고통 속에서도 '존재'를 선택함으로써 그 고통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또 다른 이야기, '판도라의 상자'는 우리에게 더 큰 울림을 줍니다.

판도라가 호기심에 상자를 열었을 때, 온갖 질병과 고통, 슬픔과 재앙이 쏟아져 나와 세상을 뒤덮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빠져나간 상자 맨 밑바닥에, 딱 하나 남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희망(Elpis)'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승은, 이 개똥밭은, 판도라의 상자가 열려버린 세상과 같습니다.

온갖 고통과 괴로움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이 세상에만 '희망'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저승'에는 희망이 깃들 자리가 없습니다.

삶이 고통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그 고통의 끝에는 언제나 희망의 씨앗이 숨겨져 있을 수 있는 가능성, 그것이 바로 '살아있음'의 특권입니다.

중국의 고전 『회남자(淮南子)』에도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우화가 나옵니다.

변방 노인의 말이 도망갔다가 더 좋은 준마를 데리고 오고, 아들이 그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치지만 덕분에 전쟁에 끌려가지 않아 목숨을 건지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당장의 불행이 결국 행복의 씨앗이 되고, 반대로 행복이 불행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삶의 모든 순간은 예측 불가능하며, 현재의 고통이 미래의 희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바로 '이승'뿐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저에게도 피하지 않고 마주해야 하는 과거의 흉터입니다.

감히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을 건네는 저 역시, 아주 어리석었던 시절, 그 '찰나의 감정'에 휩쓸려 스스로 삶의 문턱을 넘으려 했던 부끄러운 경험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나를 등진 것 같았고, 내 편은 아무도 없다는 절망감, 공허함, 무의미함이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듯한 고립감 속에서, 저는 더 이상 나아갈 힘도, 돌아갈 용기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이 모든 고통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만,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다행히도, 정말 천운인지 그 일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저를 감싼 것은 안도감이 아니었습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깊은 '허망함'과 '허탈함'이었습니다.

내가 그토록 벗어나려 했던 이 고통, 그 고통의 실체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나의 이 어리석은 시도 역시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공허함이었습니다.

마치 덧없이 사라져버린 모래성처럼, 모든 것이 헛되고 부질없다는 감정만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 깊은 허무의 바닥에서, 저는 작은 빛줄기 하나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각성(覺醒)'이었습니다.

'아, 내가 아직 이 세상에 할 일이 남아있나 보다.'

'내가 죽으면, 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고통을 남기는 것이구나.'

그제야 비로소 제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꽁꽁 싸매고 있던 나만의 고통이라는 껍질을 깨고 나오자, 바깥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의 어리석은 행동에 창백하게 질려 울고 계시던 부모님의 얼굴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던 가족들의 눈빛이, 그제야 제 심장에 박혔습니다.

나 혼자만 고통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나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고 걱정하고 있었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죽음의 문턱에 다녀와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동양 철학의 인(仁) 사상이 말하듯, 인간은 혼자서는 온전할 수 없는 '관계적 존재'임을 몸소 체험한 순간이었습니다.

나의 존재가 타인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타인의 존재가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 허망함과 각성의 순간, 저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저는 더 이상 '햄릿의 고뇌' 속에 머물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존재함'을 선택하고, 그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 나가는 여정을 다시 시작하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날의 깨달음 이후, 저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살아보니, 아무리 나를 짓누르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괴로움과 고통일지라도, 정말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제의 태풍이 오늘의 맑은 하늘을 거짓말처럼 데려오듯, 그토록 나를 죽음으로 내몰던 문제들도 언젠가는 지나간 바람처럼 희미해졌습니다.

마치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봄이 오듯, 자연의 순리처럼 고통의 시간도 끝이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저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치열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우스갯소리 같은 격언이 있습니다.

"포기란 배추 숫자를 셀 때만 쓰는 말이다." (포기, 두 포기...)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말속에는 삶을 대하는 가장 강력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포기'라는 선택지를 내 인생의 사전에 넣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미국의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하기 위해 수천 번의 실패를 거듭했지만, 그는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나는 작동하지 않는 1만 가지 방법을 발견했을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그처럼 실패를 실패로 여기지 않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어떻게든 버텨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그 치열한 노력이 전제될 때, 시간은 비로소 우리의 편이 되어줍니다.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날의 각성 이후, 제 삶이 늘 행복하고 평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고 생각하는 지금도, 여전히 삶이 버거워 어리석은 생각이 문득 스칠 때가 있음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기에, 완전한 초인(超人)이 되기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저는 저만의 주문을 외웁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This too shall pass)."

고대 페르시아의 현자가 왕에게 바쳤다는 이 문장처럼, 지금의 기쁨도, 그리고 지금의 이 고통도 영원하지 않음을 되새깁니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조차도 언젠가는 '지나간 생각'이 될 것임을 믿습니다.

이 고통의 터널도 반드시 끝이 있음을 믿고, 그저 묵묵히 버티며 걸어 나갈 뿐입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에, 그 서늘한 문턱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부디, 그 찰나의 순간만 버텨내십시오.

당신이 태어났을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주가 거대한 지적 설계에 의해 움직이든, 아니면 순수한 우연의 산물로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났든, 당신의 존재는 그 자체로 소중하며 유일무이합니다.

아직 당신이 발견하지 못했을지라도, 당신이 존재함으로써 누군가는 위로를 받고, 당신의 삶은 이 세상 어딘가에 반드시 필요한 빛을 더하고 있습니다.

개똥밭처럼 느껴지는 지금 이 순간을 버텨내고 살아남으십시오.

그 살아있는 투쟁 속에서만 우리는 희로애락을 느끼고, 희망을 발견하며,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내일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그 고독한 싸움을, 먼저 그 길을 비틀거리며 걸어왔던 사람으로서 온 마음 다해 응원합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의 소중한 한 조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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